프랑스 명품 발렌시아가를 입은 '무한도전' 멤버들의 모습을 AI로 구현한 영상. [유튜브 'Tribe Production'] |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우리는 ‘진짜’에 집착한다. TV속 미남미녀를 볼 땐 학창시절 졸업사진의 ‘타고난’ 외모가 궁금하다. 인스타그램 셀럽을 보면 카메라 필터와 보정을 벗겨낸 실물을 상상한다. 구글 검색 한번이면 붓 터치까지 확대해 볼 수 있는 명화도 원본을 찾아 미술관으로 향한다.
이렇게 ‘진짜’를 좋아하는데, 가상 세계의 영토는 왜 자꾸 넓어질까.
최근 무한도전 원년멤버들의 발렌시아가 영상(위 사진)이 화제다. 영상 속에서 발렌시아가 스타일을 입고 등장하는 유재석과 노홍철 등 멤버들은 전부 AI(인공지능)로 만들어낸 가짜다. 뜬금없는 이 영상은 해외 영상제작자가 AI로 만든 ‘글로벌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이 국내에 상륙하면서 확산했다. AI 기술로 발렌시아가 스타일을 덧입힌 ‘해리포터’ 캐릭터 영상이 이목을 끌자, 한 유튜버가 무한도전 버전을 내놓은 것이다.
발렌시아가를 입은 해리포터 캐릭터들이 나오는 영상. 모두 AI를 이용해 만든 가상 이미지다. 해당 영상은 유튜브에서 1000만 조회수를 목전에 뒀다. [유튜브 'demonflyingfox'] |
밈이 될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오픈소스 AI 프로그램에 접속해 영상 하나쯤은 쉽게 만들 수 있다. 누구나 한번쯤 가상세계의 영토를 탐낼 수 있다는 얘기다.
코치, 발렌시아가, 톰 브라운, 프라다 등 럭셔리 브랜드도 최근 AI에 눈독 들이고 있다. ‘AI 품은 명품’은 그 자체로 이슈를 몰고온다.
코치(coach)가 만든 기상천외한 AI 팝업스토어는 왜 비판을 받았을까. 톰 브라운 수트를 뽐내는 마크 저커버그 아바타는 어떤 모습일까. 아바타가 아닌 사람에게 입히는 ‘가상 옷’의 정체는 뭘까.
미국 패션브랜드 코치의 ‘임파서블 태비숍’(왼쪽), 국내 작가 서도호(61)의 ‘집 속의 집’ 전시 일부(오른쪽). [코치·archibat.com] |
미국 뉴욕에 기반을 둔 럭셔리 브랜드 코치(coach)는 이달 10일 국내에 팝업 스토어 ‘임파서블 태비숍’를 열었다. 태비백 재출시를 기념해 공개한 이번 팝업은 AI 기술로 만든 가상의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글로벌 AI모델링 기업인 ‘드롭’과 손잡고 한국적인 공간을 활용한 팝업 공간 디자인을 선보였다.
문제가 된 건 저작권이었다. 코치의 AI 팝업스토어는 공개 직후 특정 작가의 작품 속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누리꾼들은 해당 디자인이 국내 작가 서도호의 작품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공개된 사진 속 태비숍은 실크처럼 투명한 천을 재봉틀과 손바느질로 엮어낸 서 작가의 파란색 한국식 건물과 유사하다. 색깔만 분홍과 파랑으로 다를 뿐, 사용된 재료의 느낌과 짜임, 완성된 건물 형태가 비슷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코치 ‘임파서블 태비숍’(왼쪽), 크리스토(Christo)와 잔-클로드 부부(Jeanne-Claude Denat de Guillebon)의 베를린 패킹 아트(오른쪽). [코치·볼프강 볼즈] |
또 다른 AI 팝업스토어 역시 ‘패킹 아트’ 거장으로 유명한 크리스토(Christo)와 잔-클로드(Jeanne-Claude)부부의 작품 설치미술 아이디어를 도용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부풀어오른 비닐로 감싼 듯한 형태가 이들 부부의 작품 스타일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겉보기엔 비슷해 보이지만 이들 부부의 작품 세계는 가상 공간과는 철저하게 대비된다. 그 시간, 그 장소에 실제로 있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설치미술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가 실제 지형·지물을 포장하듯 감싸 만든 작품들은 미술관에 옮겨서 전시하는 게 불가능한 규모다. 한 번이라도 부부의 작품을 본 관객들이 그 순간을 잊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다.
크리스토 자바체프의 유작 ‘포장된 개선문’. [EPA=연합] |
코치가 만든 팝업 스토어는 왜 표절 논란에 휩싸였을까?
AI모델링 방식으로 이미지를 창출하는 '미드저니' 등 프로그램을 통해 만드는 창작물은 대부분 기존 이미지 레퍼런스(참고자료)를 차용하고 재가공하는 방식으로 탄생한다. 일종의 짜깁기와 재조합인 셈이다.
기자가 실제로 AI 프로그램을 이용해 이미지 두 장을 만들어봤다. ‘DALL-E’이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계묘년 바다를 바라보는 토끼 한 쌍을 그렸다. 한 장은 “두 마리 토끼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 분위기의 바다를 그려줘”(아래사진 왼쪽), 또 다른 한 장은 “해돋이를 보는 토끼 한 쌍을 클로드 모네 스타일로 그려줘”(아래 사진 오른쪽)의 명령어를 입력해 만들었다. 소요시간은 1분에 불과했다.
'DALL-E'를 통해 생성한 드로잉 이미지. 김유진 기자/@kacew |
처음부터 유명작가 스타일을 명령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AI에게 설명하기 위해선 이미 빅데이터 속에 존재하는 레퍼런스를 제시해야만 했다. 추상적인 언어보단 직접적인 작가 이름을 언급하는 게 더 효율적일 것이라 판단했다. AI에겐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받고 나니 ‘원작자가 이 그림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유명세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모방 해프닝’으로 넘겨야 할지, 적극적으로 저작권을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할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클로드 모네(1840~1926)나 반 고흐(1853~1890)는 말이 없겠지만, 현존 작가의 창작물을 AI 콘텐츠로 만든다면 법적 분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
메타 아바타. 명품 브랜드 발렌시아가 제품을 입고있다(왼쪽). 중국 아이돌 SNH48 멤버가 입은 드레스는 중국 여고생 마오셩아이가 디자인한 ‘가상 옷’(오른쪽)이다. 마오셩아이는 의류 패턴이나 소재의 특성에 대해 알지 못한다. 가상옷을 입은 이미지를 소장하거나 SNS에 업로드 하고싶은 고객들을 위해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합성해 줄 뿐이다.[메타·RADII] |
가상공간이 현실을 모방하는 동안, 현실도 가상을 따라한다. 아바타가 입던 가상옷을 실제 사람에게 입히는 ‘역전’현상이 일어난 것. 다소 현대미술스러운 이 발상은 중국의 한 10대 소녀 마오셩아이가 고안해냈다. 패션 디자인 경험이 없는 예술고등학교 학생인 그는 ‘CLO3D’, ‘Style3D’, ‘Cinema 4D’, ‘Nomad’ 등 소프트웨어로 가상옷을 디자인해 판매하면서 매스컴을 탔다.
물론 수요는 많지 않다. 그가 중국 소셜 플랫폼 샤오홍슈에 오픈한 의류 채널에서는 일주일에 가상옷 2~3벌 정도가 판매된다. 가격은 한 장에 55위안(한화 약 1만 원), 두 장에 89위안(한화 약 1만 6300원) 꼴이다. 그가 2021년 3월부터 지난해말까지 약 2년간 가상옷 판매로 번 돈은 8000위안(약 150만원)으로 알려졌다.
톰브라운 옷을 입은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아바타. [메타] |
사람이 가상 옷을 입는 세상에서 아바타는 무얼 입고 있을까. 정답은 현실에서 인기 있는 럭셔리 브랜드다. 메타(구 페이스북)는 지난해 미국·캐나다·태국·멕시코 등 국가에 아바타를 위한 디지털 옷가게를 열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메신저 플랫폼에서 아바타가 입는 가상 옷을 파는 곳이다.
이곳에선 발렌시아가, 프라다, 톰 브라운 등 익숙한 럭셔리 브랜드를 구입하고 아바타에게 입힐 수 있다. 메타는 앞으로 더 많은 브랜드를 추가하고 VR(확장현실)로도 매장을 확대할 계획이다. 마크 저커버그는 “이 디지털 굿즈는 메타버스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이자 창조경제의 큰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류이치 사카모토 라이브 연주회 ‘KAGAMI’. [The Shed] |
“현실에는 가상의 내가 있다. 가상의 나는 늙지 않는다. 수 년, 수십 년, 수 세기 동안 계속 피아노를 칠 것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1952-2023).
AI 기술이 개척한 영토가 비옥해져 갈수록, 가상과 현실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지난 3월 별세한 영화음악의 거장 류이치 사카모토 (Ryuichi Sakamoto)가 오는 6월 초연에 나서는 연주회가 대표적이다.
이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모습을 가상현실로 재구성한 이번 공연의 타이틀은 ‘KAGAMI’(鏡·거울)다. 공연을 기획한 뉴욕 맨해튼 아트센터 ‘더 쉐드(The Shed)’는 이 공연에 무려 ‘라이브’라는 도발적인 수식어를 붙였다. 늙지도 죽지도 않고 피아노를 치겠다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생전 바람을 담은 카피다.
‘죽은’ 음악가의 ‘라이브’ 콘서트. 한편으론 경이롭지만, 한편으론 두려움도 엄습한다. AI가 내 직업을 대체하는 건 아닐지, SNS에 올린 내 사진이 어딘가에서 딥페이크 영상에 이용되는 건 아닐지’ 등의 우려다.
이는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이달 초 미국 로스앤젤레스 거리에는 수천명의 미국작가조합(WGA) 소속 할리우드 영화·방송 프로그램 작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영화·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자연맹(AMPTP)에 ‘AI 기술 사용 제한’과 처우개선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피켓을 들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명품 업계도 긴장하긴 마찬가지다. 불안한 상상 끝엔 AI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비관도 머문다. 창작의 재료가 되는 아이디어의 실체가 없다면, 그럴 싸한 흉내를 내는 AI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오랜 역사와 장인정신, 오리지널리티(고유성)가 생명인 럭셔리 브랜드가 AI 기술의 ‘성행’을 어떻게 방어하고 이용할 지에 달렸다. 명품 진영이 ‘AI 부메랑’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희망은 없다.
kacew@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