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안정·자산유동화 수단으로
개인금융 활성화로 금융상품화
서민지원 명분, 한도·대상 확대
대출규제 회피, 갭 투자에 활용
금리상승·집값하락→역전세·사기
전세금융 오남용 부작용 드러나
통제강화해야 ‘그림자금융’ 안돼
“정치란 바로 잡는 것이다. 공평하게 바로 잡는게 정(正)이다. 공정(公正)은 과한 것은 막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이다. 지나친 것도 모자란 것도 모두 공정이 아니다” -관자(管子)
공자(孔子)의 중용(中庸) 사상과 통하는 가르침이다. 논어(論語)에도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過猶不及)는 구절이 나온다. 넘치지 않으면서 모자라지도 않는 적정선이 중요하다.
모자란 것을 채우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가득 채우는 것이 적정선일까? 잔에 음료를 채울 때 넘치지 않을 정도로 채우는 경우는 드물다. 모자라면 보태면 되지만 넘치면 낭패일 수 있다.
부동산 시장이 불안해지면서 전세(傳貰) 제도와 전세자금 대출이 ‘뜨거운 감자’가 됐다. 집을 살 여력은 부족하고 월세 부담은 큰 서민들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사적 차입이다. 숨은 가계부채를 늘리는 주요한 요인이다. 주택관련 대출 규제의 우회로로 활용돼 집값 상승세를 더욱 자극하는 문제점도 드러났다. 전세 제도를 없애고 대신 주택 구입과 월세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다시 등장했다.
전세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제도다. 배울 수 있는 해외 사례가 없다. 주택시장과 금융시스템의 본질을 고려할 때 제도를 아예 없애거나 급격히 위축시키는 과격한 접근 보다는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어떤 제도가 오래 기능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제도 자체의 효용이 다했을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운용의 실패라면 교각살우(矯角殺牛)를 경계해야 한다.
전세가 어떻게 유래하고 바뀌었는지 살펴보면 제도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이를 지나치게 확대한 정책적 판단에 잘못이 있어 보인다. 특히 전세 제도가 주거안정과 금융시스템의 주요한 부분이 됐음에도 이를 적절히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부족했다.
▶전세의 역사…‘반쪽 은행’ 시대, 사금융의 유산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주택이 부족해졌다. 당시엔 적금 이자율이 높아 월급을 최대한 저축하는 게 유리했다. 은행은 주로 국민이 저축하는 돈을 기업에만 빌려주는 ‘반쪽’ 역할만 했다. 개인이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는 어려웠다. 도시에 정착한 노동자들은 일단 월세에 살면서 저축으로 목돈을 만들었다. 어느 정도 목돈이 모이면 전세로 전환했다. 돈을 빌려 집을 살 수 없었던 시절 전세는 내 집 마련으로 가는 중간 단계였다. ‘전세 살이’는 중산층의 상징이었다.
1980년대까지도 국민소득은 그리 넉넉하지 못해 생활자금이 부족한 이들이 많았다. 금융회사를 이용하기 어려워 사(私)금융이 발달했다. 계(契)가 성행했다. 금융회사보다 이자율도 훨씬 더 높았다. 은행 예금금리가 20%대일 때 사금융에서는 ‘3부’나 ‘5부’ 이자가 흔했다. 무려 월 3%, 월 5%짜리 이자다. 집 주인은 목돈인 전세 보증금을 받아 사금융으로 굴리면 상당한 수익이 가능했다.
1980년대에는 도시화와 수도권 집중으로 주택 부족이 심각해진다. 아파트 개발 붐이 일어났다. 집값과 전셋값 모두 급등했다. 기존 집을 팔지 않고 새 아파트를 장만할 때 전세 보증금은 소중한 목돈이었다. 1989년 4월 1기 신도시 건설 계획을 밝힌 정부는 전세가격 안정을 위해 계약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렸다. 1992년 1기 신도시 입주가 시작되면서 집값과 전셋값은 일단 안정됐다.
▶전세의 진화…갭(gap) 투자의 등장, 제도권 금융 편입
외환위기를 극복한 이후 소득이 늘고 금리는 하향 안정됐다. 개인도 금융회사를 이용하기 쉬워졌다. 은행들도 장기 저리로 집 살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중국 발 호황으로 경기도 좋았다. 국토균형발전을 위해 행정수도 건설과 주요 공공기관 지방이전이 추진되며 천문학적인 토지보상금까지 전국에 풀렸다. 이자율은 낮은데 자산가격은 가파르게 올랐다. 빚 내서 집을 사면 재산을 쉽게 불릴 수 있었다. 집 값이 급등하자 정부는 부동산 대출 규제를 도입하지만 호황은 계속됐다. 전세를 끼고 집을 사면 대출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집값이 하락했다. 이자 부담에 빚 내서 집 산 이들이 ‘하우스푸어’(house poor)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인구가 줄면 주택 수요도 줄어 결국엔 집값이 떨어질 것이란 주장들도 힘을 얻었다. 세금 등 각종 보유 부담과 무주택 혜택을 감안하면 전세로 사는 게 집을 가지는 것보다 낫다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에 호응(?)해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서민주거 안정을 명분으로 전세자금 대출한도를 최대 1억원까지 높였다. 2009년 9월에는 최대 2억원으로 확대했다. 이어 공적 기관의 보증한도를 높이고 무주택 세대주 요건은 없앴다. 위험없이 이자수익을 낼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은행들은 불티나게 전세자금 대출을 팔았다. 목돈이 없어도 전세자금 대출로 살 집을 빌릴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전세의 왜곡…투기사다리 된 그림자 금융
중국 경제 냉각의 타격으로 우리나라 경기도 가라앉자 2014년 7월 정부는 부동산을 통한 부양을 선언했다. 당시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이름을 딴 ‘초이노믹스’다. 참여정부에서 도입을 했던 재건축 규제는 물론 대출 제한도 거의 다 풀었다. 정부는 ‘빚 내서 집 사라’고 권했다. 한국은행도 2014년 6월 2.5%이던 기준금리를 2015년 6월 1.5%, 2016년 6월에는 1.25%까지 떨어뜨리며 거들었다. 금리가 떨어지자 자산가격 상승을 노린 주택구입 수요가 늘어났다. 다주택자 규제가 아직 없을 때다.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갭 투자가 활발해졌다. 1주택자도 전세 대출금을 다주택 구매에 활용하는 전략이 가능했다. 중상층(소득상위 4~5분위)의 전세자금 대출이 크게 늘어났다.
부동산 시장이 과열되기 시작하자 2018년 정부는 고가주택과 유주택자 전세자금 대출을 규제했다. 그런데 정부의 부동산 투기 억제대책이 주택공급을 제한하며 전셋값은 더 가파르게 올랐다. 전세자금 대출도 계속 늘어 이용가구 비중은 2012년 5.6%에서 2021년 12.2%로 3배, 대출금은 23조원에서 180조원으로 8배 가까이 급증했다. 대출액수 제한에도 일단 한도까지 받고 부족한 부분은 신용대출로 충당했다. 금리가 가장 낮았던 2021년 중반 개인대출 금리는 약 2.7%였다. 1억원을 빌려 쓰는데 내는 한달 이자가 고작 22만5000원이었다. 순수전세 비율이 줄고 전세와 월세가 섞인 전월세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전세의 역습…고금리, 역전세, 빌라왕
2021년 하반기부터 한은은 물가안정을 위해 기준금리를 올렸다. 2022년 7월부터 가장 강력한 대출규제인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이 전면적으로 적용됐다. 집값이 하락하고 전셋값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한은은 2021년 가계금융복지 조사에서 전세보증금이 10% 하락하면 임대가구의 11.2%는 금융자산을 처분하거나 돈을 빌려서 보증금 감소분을 마련해야할 것으로 예상했다. 3.7%는 금융자산을 팔거나 돈을 빌려도 돌려줄 보증금을 마련하기 어려운 것으로 분석했다. 한은의 예측은 금리 인상이 본격화되고 실제 집값이 하락하며 현실이 됐다. 보증금을 제대로 반환하지 못하는 집 주인이 속출했다. 2022년 하반기부터 집값이 전세 보증금에 못 미치는 ‘역전세’가 등장했다.
전세 대출의 허점을 이용한 사기사건까지 곳곳에서 터졌다. ‘빌라왕’으로 불리는 사기꾼들은 전세자금 대출의 시세 대비 보증비율이 높고, 아파트가 아닌 주택은 가치평가가 어려워 인위적인 감정평가로 시세를 조종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했다. 전세사기 이후 보증은 더 까다로워졌다. 전세자금 대출은 더 위축됐다. 대출이 어려워지고 보증금 반환 위험은 더 커지면서 전셋값이 급락했다. 전셋값 하락은 갭 투자 등으로 높아진 매매가격까지 떨어뜨렸다.
전셋값과 집값의 동행은 이전과 다른 양상이다. 금융위기 직후인 2012~2013년에는 매매가격이 1.4% 내릴때 전세가격은 오히려 5.8% 올랐다. 당시엔 매매수요가 전세로 이동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지만, 최근에는 둘 모두 금리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으면서 같은 방향으로 반응하게 됐다. 전세의 금융화 결과다. 임대시장이 매매시장을 흔드는 ‘꼬리 위험(tail risk)’이 더 커졌다.
▶탈 많은 전세, 차라리 없앤다면?
당장 전세 제도를 없애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2020년 기준 약 325만2000가구, 전국민의 15.5%가 전세로 거주하고 있다. 전세 제도를 없애면 일시에 보증금을 반환해야 한다. 집 주인이 반환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유동성 부족과 부동산 가격 폭락으로 금융시스템 전반이 위협받게 된다.
임대료를 전부 월세로 내도록 하면 무주택자의 주거비 부담이 상당히 커진다. 주택임대차보호법 시행령은 월차임전환율을 정하고 있다. 임대차 보증금을 월세로 변경할 때 적용하는 비율이다. 현재는 10% 또는 ‘기준금리+2%포인트’ 가운데 낮은 비율이다. 현재 기준금리가 3.5%니까 연 5.5%다. 현재 은행 전세대출 이자율(최고 5%) 보다 높다.
4월 기준 서울 아파트 중위 전세가격은 약 5억원이다. 연 5.5% 월세로 전환하면 230만원이다. 서울의 3인 가구 중위소득은 420만원이다. 소득의 반 이상을 월세로 내야할 수 있다. 전세가 없어지면 목돈이 있더라도 월세를 내야 한다. 그런데 이자수익으로 월세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예금이자율은 은행이 2%, 저축은행이 4%대다. 5억원을 맡겨도 세금 제외 후 이자는 연 2000만원에 한참 못 미친다.
▶전월세 확대 진행 중…전세대출 ‘서민금융’으로 제한해야
전세 제도의 부작용은 서민의 ‘주거사다리’를 서민이 아닌 이들이 ‘투기사다리’로 활용할 여지를 키운 데서 비롯됐다. 무주택, 청년, 신혼부부 등 서민의 기준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잣대로 전세자금 대출의 자격과 한도를 정하면서다. 무주택, 청년, 신혼부부라고 모두 살림살이가 빠듯하지는 않다. 전세자금 대출은 공적 기관의 보증으로 이자율이 낮다. ‘지원’ 성격을 갖는다. 스스로 돈을 빌릴 수 있는 이들까지 전세를 명목으로 ‘지원’할 이유는 없다.
전세 시장을 비정상적으로 키웠던 초저금리 환경은 당분간 다시 만들어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전세를 이용한 과도한 차입 부작용이 드러나면서 최근 월세 선호가 뚜렷해졌다.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보면 2014년 지방에 이어 2020년에는 서울에서도 보증금 있는 월세의 비율이 전세를 추월했다. 전세 보증금의 미상환 위험은 낮추는 대신 월세를 일부 부담하는 전월세의 보편화가 진행중이다.
소득이 낮을수록 매월 현금을 지출하는 월세 부담이 클 수 밖에 없다. 소득이 적은 이들에게 저리로 전세 보증금을 지원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월세 부담을 줄여주는 접근이 바람직하다. 역전세 방지를 위해서 보증금 비율을 매매가격 대비 보수적 수준으로 관리할 필요도 있다. 전세자금 대출도 원칙적으로 DSR 규제를 적용하고 ‘지원’이 필요한 이들에게만 예외를 허용하는 접근이 바람직하다.
▶전세 통계 양성화…‘그림자’ 줄여야
전세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그림자금융(shadow financing)이다. 실체가 불분명하다. 정확한 시장규모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은이나 금융감독원에서도 전세자금 대출 통계는 주로 주택관련대출에 포함돼 공표된다. 개별 자료를 찾기 어렵다. 금융거래 내역을 확인하면 전세자금 대출 현황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정부와 한은은 전세금융 관련 통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공개할 필요가 있다.
전세 보증금을 받은 집주인의 차입 위험은 아예 통계가 없다. 돌려줄 보증금도 결국엔 부채이지만 사적계약이어서 금융관련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통계화가 필요하다. 다행히 올해 6월부터 전월세 신고제가 시행된다. 보증금이 6000만원을 넘거나 월세가 30만원을 초과하면 계약 체결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임대인과 임차인이 의무적으로 계약 내용을 주택 소재지 주민센터나 온라인 부동산거래관리시스템에 신고해야 한다. ‘정부24’에서 전입신고를 하면 임대차 계약서 등록으로 자동으로 신고 처리가 된다. 사적 계약으로 인한 차입도 이제는 통계화가 가능해진다.
주택임대차 계약은 결국 집과 돈을 서로 빌려주는 법률 행위다. 금융회사 입장에서도 대출을 할 때 얼마만큼의 사적 채무가 있는 지 확인한다면 연체나 미상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집 주인의 신용등급 산정에 전세 보증금 정보를 반영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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