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이란·이라크 ‘오월동주’ 이뤄내
첨단기술 규제에 자원·희토류로 맞서
고물가·고금리 지속되면 성장 어려워
세계은행, ‘잃어버린 10년’ 다시 경고
韓경제 구조적 약점 심각…대책 시급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비롯한 주요 산유국들이 ‘갑작스런’ 감산을 결정했습니다. 보통 생산량 조정할 때는 회의라도 하는데 이번에는 그것도 안했다고 하네요. 갑작스럽지만 느닷없지는 않아 보입니다. 기억하시나요? 지난해에도 OPEC는 한차례 감산 시도가 있었죠. 미국의 압박에 철회를 했지만 분명 시도가 있었습니다. 결국 1년도 안돼 다시 감산 카드가 다시 등장했네요. 전세계가 물가 때문에 고민인 상황에서 결국 자원을 무기화하려는 모습입니다. 코로나19 이후 경제를 안보의 관점으로 보는 나라들이 많아졌죠. 패권을 지키려는 미국과 그에 도전하는 중국과 러시아 등 반미(反美) 진영의 갈등은 결국 자원전쟁으로 귀결되지 않을까요. 지난 달 27일 세계은행에서 나온 세계경제의 ‘잃어버린 10년’ 우려도 그 연장선상에서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한동안 미국과 유럽의 은행 위기 때문에 에너지와 원자재 시장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줄었습니다. 금융만큼이나 중요한 게 원자재입니다. 인류가 이룬 거의 모든 것은 지구가 품은 원자재를 개발하고 소비한 결과죠. 자원의 무기화는 정치 문제이자 경제의 난제입니다. 나라간 이해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어 은행 문제보다 해결이 더 어려울 수 있죠. 소홀이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올해 전세계 외교분야에서 가장 눈부신 성과를 이룬 주인공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입니다.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했고, 오랜 앙숙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화해를 이끌어 냈습니다. 공통점은 2가지입니다. 다들 자원은 많은데 미국을 싫어하는 나라들이죠. 중국, 러시아야 미국과는 원래 물과 기름이었다고 해도 사우디는 왜 그럴까요?
사우디는 1974년 1차 석유파동 이후 파이살 국왕이 미국과 ‘패트로(petro) 달러 협약’을 맺습니다. 세계 1위 산유국인 사우디가 국제 석유 거래를 달러로만 하는 대신 미국은 사우디의 안보를 책임지는 거래였죠. 덕분에 미국은 금 태환을 중지하고도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중동에서도 아무도(심지어 이스라엘 조차도) 공식적으로는 사우디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패트로 달러 협약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이었습니다. 미국이 당시 중동 문제에 깊숙이 개입했던 이유죠. 셰일가스가 발견되면서 미국은 이제 에너지 자립을 넘어 수출까지 가능해졌습니다. 사우디에서 가장 많은 원유를 수입하는 나라는 중국으로 바뀝니다. 최근 중국이 중동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사우디는 중국과 무역거래(원유는 제외)를 위안화로 결제하기로 합니다.
현재 사우디 왕은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입니다.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 빈 압둘 라만 알사우드의 25번째 아들입니다. 사우디는 1953년 이후 압둘 아지즈의 아들들이 형제상속으로 왕위를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살만 왕의 후계자는 아들입니다. 흔히 빈 살만 태자(독립국은 세자가 아님)로 부르는 데 사실 옳지 않습니다. 빈 살만은 살만의 아들이란 뜻이죠. 줄인다면 무함마드가 정확하겠죠.
무함마드는 32세 때인 2017년 이후 정변을 통해 사실상 사우디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젊은 통치자답게 강한 사우디를 추구했죠. 석유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의 혁신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석유 의존을 벗어나려면 석유에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 게 사우디 처지죠. 무함마드는 직접 석유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국영회사인 아람코의 기업공개(IPO)도 성사시키죠. 이런 무함마드의 행보는 미국의 국익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자동차의 나라인 미국은 기름값이 정말 중요합니다. 정권을 바꿀 정도의 위력이라고 하죠. 셰일가스 덕분에 미국이 다시 중동에 깊숙이 개입할 필요는 줄었습니다. 그래도 요즘엔 워낙 물가 고민이 커서 기름값까지 정말 골치아프겠죠? 지난해 겨울이 예상보다 따듯해서 최근 원유가격이 많이 하락했습니다. 3월에는 한때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가격이 배럴당 70달러 아래로까지 떨어지기도 했죠.
이번 감산은 국제 유가 하락을 부추기는 미국의 금융 세력에 대한 사우디 석유장관 압둘 아지즈의 반격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무함마드의 이복 형인 압둘 아지즈는 최근 국제선물시장에서 원유 가격하락을 부추기는 매도(short) 거래가 늘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국제 금융시장을 움직이는 건 미국이죠. 국제 유가가 하락하면 미국은 물가가 안정돼서 좋겠지만 사우디와 러시아는 수입이 줄죠. 이번 감산 조치는 회의도 없이 이뤄졌지만 사우디와 러시아 사이에 사전 협의는 이뤄졌다고 합니다.
사우디와 러시아 뿐 아니라 경제 재건이 필요한 이란과 이라크도 고유가는 반길 일입니다. 두 나라 모두 어마어마한 천연가스와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지만 전쟁과 국제 제재로 그 동안 제대로 돈을 벌지 못했죠.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우디·이란·이라크지만 돈 앞에서는 ‘대동단결’(?)하는 모습입니다. 아마 앞으로 상당기간 OPEC는 미국에 맞서 높은 수준의 유가를 유지하려 할 것으로 보입니다.
기름값이 오르면 물가가 떨어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겠죠. 무기로 변하고 있는 건 화석연료만이 아닙니다. 중국은 최근 미국 마이크론의 반도체에 안전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규제에 대한 보복이죠. 반도체 수입하는 중국이 반도체 수출 회사에 칼을 든 배경은 뭘까요? 희토류(稀土類) 입니다. 중국에서만 나는 희귀 광물이 없으면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제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전기차 배터리에 쓰이는 리튬은 이미 난리입니다. 중국은 세계 리튬 공급의 60%를 좌우합니다. 중국의 전기차 시장은 현재 세계 최대이고 앞으로도 당분간 그럴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에 밉보이면 싼 값에 전기차 배터리 만들 생각은 접어야 하겠죠. 최근 포드가 중국 CATL와 손을 잡은 것도 이 같은 사정을 읽은 결과로 보입니다. 중국 CATL의 최대 경쟁자는 모두 한국업체 입니다.
‘주식 시장은 우상향한다’는 믿음은 ‘경제는 결국 성장한다’는 전제 아래에 가능합니다. 세계은행의 잠재성장률 추이는 2000년대 3.5%, 2010년대 2.6%로 떨어졌고 2020년대에는 2.2%까지 밀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세계은행은 2020년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예상하면서 3가지 요인으로 고령화(aging workforce), 투자위축(weak investment), 생산성 둔화(Slowing Productivity)를 꼽습니다.
자원 무기화가 안보이죠? 숨겨져 있어 그렇습니다. 세계은행은 올해 글로벌 경제 전망에서 지속적은 고물가가 경기침체를 불러와 성장률이 1.7%에 그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물가를 자극하는 데 원자재 가격만큼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없죠. 원가가 높아지면 생산성을 높여야 수익성을 유지할 수 있는데 고령화로 노동 효율이 떨어지고 고금리로 투자비용 부담이 커진다면 쉽지 않겠죠?
국제통화기금(IMF)의 올해 글로벌 경제성장 전망은 2.9%입니다. 세계은행이 지나치게 비관적인 것일 수도 있죠. 국제 갈등과 자원의 무기화로 고물가 고금리가 지속된다면 비관적 시나리오가 적중할 확률이 높아지게 됩니다. 중·러 밀월과 중동의 정세에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입니다.
미국이 첨단기술을 무기화하면서 우리에게는 사실상 중국 시장을 포기하라는 압박을 하고 있습니다. 반미 진영이 자원을 무기화하면 우리는 서방시장에서도 입지가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자원시장도 강대국들이 장악하고 있어서죠. 외교 잘못하면 우리 경제 정말 큰 일 날 듯 합니다.
ky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