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남편의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집안의 물건을 챙겨 달아난 결혼 이주여성에게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동부지법 제11형사부(설범식 부장판사)는 남편에게 수면제를 먹여 잠들게 한 뒤 현금 등을 가지고 달아난 혐의(강도)로 기소된 필리핀인 A(23ㆍ여)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22일 밝혔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배심원 7명도 만장일치로 무죄 평결을 냈다.
재판부에 따르면 지난해 5월 김모(46) 씨와 혼인신고를 한 A 씨는 비자 문제로 입국하지 못하다가 10월 2일 한국에 들어와 김 씨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A 씨는 김 씨가 이혼을 했고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도 살림을 꾸렸지만 남편은 ‘가혹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김 씨는 입국 당일부터 A 씨를 드라이버로 위협해 청소를 시켰고 대부분의 끼니를 라면과 초콜릿으로 때우게 했다. 또 나이트클럽에서 탁자 위에 올라가 춤을 추게 시키는가 하면 필리핀 여자들을 데려와 술집에서 일을 시키고 돈을 벌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김 씨는 급기야 말다툼 도중 A 씨에게 수갑을 채운 채 삼단봉으로 때릴 듯이 위협했고 A 씨는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망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A 씨는 결국 한국에 온 지 2주 만인 10월 16일 오전 7시께 수면제를 탄 커피를 먹여 김 씨를 잠들게 한 뒤 현금 20여만원과 김 씨의 여권 등을 가지고 집을 나갔다가 붙잡혀 기소됐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생명과 신체에 위협을 느껴 탈출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고 굳이 여권을 빼앗으려고 수면제를 탄 커피를 줬다고 보기 어려워 강도의 고의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무죄 이유를 밝혔다.
또 재판부는 “귀금속이나 고가의 노트북 등은 가지고 나오지 않았고 현금은 사건 전날 훔친 것으로 보여 수면제 섞인 커피를 마시게 한 것과 물건을 챙긴 행위 사이에 인과 관계가 없다”고 판시했다.
도현정 기자/kate01@heraldcorp.com